안녕, 빨간 안경

지난주에 잃어버린 빨간테의 안경은 2년여를 나와 함께 해온, 이제는 내 트레이드마크가 되다시피한 나름 소중한 물건이었다. 중학교 때 엄마가 사준 첫 안경을 제외하고는 줄곧 싼 것만 고수해오다 처음으로 내 돈 들여 무려 7만원 짜리 테를 집어들게 한 녀석. 모두들 잘 어울린다 말해주었고, 심지어는 안경을 벗고 다니면 안경을 쓰라고 성화일 정도로 그 안경과 나는 떼놓고 생각할 수 없는 유쾌하지도, 그렇다고 기분나쁘지도 않은 관계가 되어 있었다.

나이가 들어서 아무리 술을 많이 마셔도 안 하던 짓을 하나 둘씩 하게 되면서, 결국 안경을 어딘가 벗어놓고 다니는 지경에 이르렀다. 잠에서 깨어나 안경이 보이지 않음을 깨달은 나는, 존재하는 것들을 선명히 볼 수 없다는 답답함보다는 어떤 존재를 상실한 것과 같은 막연함을 느꼈다. 여느 안경 같았으면 다시 안경을 맞추는 수고로움과 지불해야 하는 비용에 대한 아까움이 먼저였겠지만 이번만큼은 달랐다. 대상이 빨간 안경이었으니까.

도수도 맞지 않는 예전 안경으로 주말을 버티고 월요일 하루를 더 버티다 퇴근 후 안경점에 들렀다. 빨간 안경의 잔재가 남아 쉽사리 테를 고르지 못하고 한 시간 이상을 고민한 뒤 겨우 하나를 고를 수 있었다. 가격이 무려 22만원. 계속되는 고민과 자신에게 돌아오는 안경 빼고 넣기의 번거로움에 지친 탓인지 아저씨가 렌즈까지 27만원인 것을 4만원이나 깎아준다. 아가씨가 엄살을 너무 심하게 부려서 깎아주는 거라며.

엄살이 아니었다. 나는 안경이라면 싸면서 적당히 예쁘고 잘 어울리는 걸로 고르면 된다는 생각을 가진 사람이었고, 비싸고 예쁜 안경을 보면 좋기야 하지만 내가 거기에 돈을 쓰게 될 거라고는 생각해본 적도 없었다. 무엇보다 22만원짜리 안경보다 내 7만원짜리 빨간 안경이 더 예쁘다 여겨졌고, 그만큼 미련도 컸다.

굉장히 사소한 부분이지만 앞으로 그만큼 내 마음에 드는 안경을 또 다시 만날 수 있을까. 걸핏하면 다리가 늘어나 헐렁헐렁 줄줄 흘러내리기 일쑤였지만, 그래서 테를 바꿔버릴까 생각한 적도 있지만, 그래도 내게는 더없이 아낌을 받았던 빨간 안경.
안녕, 널 잊지 못할 거야. 알 수 없는 어딘가에서 굴러다니고 있겠지만 그래도 작별인사를 건네마. 안녕.


by 뇌를씻어내자 | 2007/08/22 10:06 | 쭈 다이어리 | 트랙백 | 덧글(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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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by 종이우산 at 2007/08/22 10:33
안녕 빨간 안경 ;ㅅ;/
Commented by Dummy at 2007/08/22 13:26
이런이런..
Commented by 미도리 at 2007/08/22 14:35
훔 .. 'ㅁ'
Commented by 뇌를씻어내자 at 2007/08/22 18:05
모두 작별을 고해주세요, 제 빨간 안경에게.
Commented by 달바람 at 2007/08/22 23:18
처음(이자 지금까지는 마지막) 봤을 때 그 빨간 안경을 쓰고 계셨는데, 그렇게 오래 쓴 안경을 다음에는 그걸 못본다니 조금 아쉽군요.
Commented by 뇌를씻어내자 at 2007/08/24 11:57
달바람: 처음 봤을 때? 아아 홍대에서. 그러게요. 하지만 전 뭘 써도 예쁘니 새로운 만족감을 안겨드릴게요. ㅡ,.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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